고요함의 오아시스

 

염천의 하늘 아래를 걷노라니 속이 달친다. 햇볕보다 더 뜨거운 것은 달아오른 사람들의 마음이다. 무심한 이들은 여전히 무심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에 친 이들의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거리에 나선 이들의 억눌린 함성은 마땅히 들어야 할 사람의 귓전에 닿기도 전에 스러져버리고 만다. 백성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는 하늘에까지 울린다는 데, 그 아우성 때문에 샘물마저 마른다는 데. 오늘 우리가 목이 마른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회조차도 샘물이 되지 못하는 시대이다.

 

유럽의 어느 교회에 들어갔다가 ‘고요함의 오아시스’라는 말과 만났다. 도시의 분잡을 떠나 들어간 그 예배당에는 고요가 좌정하고 있었다. 고요함은 있음 그 자체로 피로와 분심을 씻어내고, 활동과 욕망으로 달뜬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내 마음속에서 세상의 소음이 그친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 그 고요함이 내가 집착하던 온갖 삶의 장치들이 그다지 중요할 것 없는 것들임을 일깨울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두렵고도 매혹적인 물음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요함은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봉인해준다는 사실이다.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베네딕토 성인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는 수비아코에 있는 동굴에 숨어 3년간 기도와 관상의 세월을 보냈다. 그곳에 성인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자연스럽게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대 그레고리오는 <대화록>에서 베네딕토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한 미친 여자가 있었다. 그는 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으로 들고 계곡으로 숲으로 쏘다녔다. 그는 기력이 다하여 쓰러졌을 때만 쉴 뿐이었다. 정처 없이 헤매던 어느 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베네딕토의 동굴에 들어가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여인이 그 동굴을 떠나는 순간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싶게 멀쩡해져 있었다. 그는 여생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어떤 설명을 덧붙인다면 그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베네딕토의 동굴과 오늘의 교회를 나란히 놓아보니 왠지 씁쓸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삶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삶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 부풀려진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에 깃든 허섭스레기들을 걷어내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만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존재이유일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실감난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57:10) 오늘의 교회가 이런 헛된 관념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앙은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는 것이다.

 

제 정신을 차린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은 누구도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우’를 지키는 책임을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진다. 사사로운 나를 버리지 못한 사람, 거리에서, 봉쇄된 직장에서 억눌린 함성을 지르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조차 알지 못한다. 고요함의 오아시스에서 기쁨과 치유의 샘물을 맛본 이들은 또 다시 광야를 향해 떠나야 한다. 그것이 생명의 리듬이니까. 이 여름날, 형제자매를 위해 서늘한 그늘이 되어주는 이는 복이 있다.

/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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